나는 간호학과를 엄청 오고싶어서 온건 아니다. 어릴때 꿈이 간호사이긴 했지만 크면서는 수의사에 더 끌리긴 했다. 그래도 재수를 하고나서 성적이 나오니 내가 갈수 있고 취업이 잘 된다고 하는 간호학과를 왔다.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도 이상한 점이 많긴 했다. 1,2학년때는 교양과 전공기초과목 위주였으니 몰랐지만 3,4학년때는 실습도 많아지고 교수님을 만날 일도 많았으니 점점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선 기본적으로 다른 대학생들은 누리는 자유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염색도 못하고, 자리도 고등학교때처럼 전부 정해져있고, 출석도 매번 다 부르고, 졸거나 핸드폰 하면 혼나고... 실습을 시작하면서 더 심한 것 같았다.
일단 아프더라도 실습을 빠지면 해당 부서 수간호사한테는 완전 찍히는 거다. 학생들은 같이 따라다니는 간호사 선생님이 앉으라고 안하면 앉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서있고 그러다 쓰러지는 학생도 일년에 한두명씩 나왔다. 어떤 동기는 실습 도중 쓰러졌더니 다음날 실습에서 그 부서 수간호사가 "너 이런 식으로 할거면 나오지 마라"라고 하면서 화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별것도 아닌걸로 꼽을 준다. 한 동기는 마스크를 낀 상태에서 수간호사와 눈을 마주쳤는데 "너 왜 눈을 그렇게 동그랗게 떠?"하면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동기는 따라다니는 간호사가 카덱스에 써놓은 메모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은 내가 만난 최악의 학생이네요, 그렇게 남의 기술 훔쳐보는거 도둑질이다"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나도 몇번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혼난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거까지 쓰면 너무 특정되는것 같아서 생략..
좋은 점은 우리 학교는 나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자대병원이 있었고, 자대생은 면접을 개판으로 치지 않는 이상 무조건 뽑아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적이 좋진 않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면접준비와 국시준비를 해서 면허를 땄고 자대병원에 붙었다. 우리 병원은 분위기가 삭막하고 아주 많이 태운다고 유명한 병원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서도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웨이팅 기간을 보냈다.
그리고 부서가 발령이 난 날.... 동기들이 전부 너무 좋다고, 천사병동이라고 하던 부서가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선생님들도 너무 착하고 환자들도 착하다고 하는 병동이었다. 성적도 안좋던 나를 그 부서에 붙여준 우리 학교 병원에 너무 고마웠고 정말 오래 열심히 다니고 싶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도 정말 착한 것 같았다. 신규가 와서 든든하다고 열심히 잘 배우라고 격려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프셉 선생님도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부서는 정말 간호사가 적고 인력이 부족한 부서였다. 신규도 원래 잘 뽑지 않는 병동이고..; 나는 시니어 업무를 보는 프셉쌤 옆을 따라다녔고 독립 전까지 액팅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다닌 건 한 3~4번밖에 되지 않았다. 시니어는 대부분 가장 중하지 않은 환자를 6명 정도 보며 시니어 업무를 했는데 그럼 내가 뭘 배울 수 있겠는가......................... 액팅 선생님을 따라다닐 때도 그 선생님들은 프셉을 할 연차가 되지 않아서 가르쳐주는 것이 많지 않고 자기 일 하시기에 바빴다. 결국 프셉 선생님이 시니어 업무를 볼 때 나는 잡일을 하거나 혼자 공부를 하곤 했다.
그리고 동기 하나 없는 병동에서 연차 높은 선생님들이 지적조로 말씀하시는 게 너무 힘들었다. 태움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유리멘탈인 나에게는 충분히 상처가 됐던...
야식 먹은 것을 치우러 휴게실로 들어갈 때에도 "너가 여기 들어올 짬이 되긴 해? 나가서 공부나 해"라고 하거나, 한번 보여준 것을 제대로 못 따라하면 "내가 어제 가르쳐줬는데 하나도 안들었지? 너 공부 안하지?"라고 한다거나, "니가 보는 환자가 불쌍하다" "징징대지 좀 마" "쌤 심각하다. 이 정도면 정규직 못돼(사실 이 말은 우리 병원 거의 모든 신규간호사가 듣는 말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때문에 걱정되어서 퇴사한 것도 있는데)" "평소에 쓸데없는 고집 좀 부리지 말고 쌤이 말하는 거면 받아들여" 아니면 인사를 작게 했다고 혼낸다든지.. 프셉쌤이 예민한 날은 정말 눈치보면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프셉쌤 아닌 연차 높고 성격 별로인 선생님이랑 한 날도 있었는데 그날은 정말 지옥이었다...
어찌저찌 독립을 한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독립 일주일 만에 크다면 큰 사고를 치고 만다. bp가 50대까지 떨어진 환자를 노티를 늦게 한 것이다. 그날도 연차 높고 성격이 매우 별로인 선생님이랑 일을 하는데 내가 하루종일 너무 혼나서 정신이 없었는지 스테이션에 돌아와서 다른 걸로 혼나는 순간 노티할 것을 잊어버린 거다.. 그래서 노티가 10분? 15분 정도 늦어졌고 그걸 들은 선생님이 "너 개소리 하지마. 그정도면 환자 코드블루 올수도 있어" 라고 하시는 순간 그냥 ... 때려치자 이생각만 들었다...
마지막 날까지 병원은 날 곱게 보내주질 않았다. 수선생님이랑 사직면담을 하는데 전날 내가 퇴근 전 OP 환자에게 달아야 할 TPN을 누락시켜서 전공의가 전화로 노발대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내 환자고 내가 잘 봤어야 하고핑계지만... 프셉이었던 선생님이 그 TPN이 DC가 나서 반환칸에 넣으라고 해서 넣었는데 알고보니 중복처방으로 1개를 DC한 것이었다. NPO유지중이었던 환자는 TPN을 못받은 채 하루밤이 지났고 N번 선생님도 달아주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 날까지 나는 사건보고서를 쓰고 퇴사를 했다. (프셉쌤은 왜 그러신 걸까..)
수선생님은 내가 퇴사하는 걸 막지는 않았다. 원래 첫 사직 면담때 그 달까진 일해달라고 해서 꾹 참고 일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안될 것 같아서 응급사직을 요청하니 그냥 너가 이러면 민폐다, 너 때문에 듀티 꼬이는 거고 출근할 사람도 지금 없다고 했다. 그래도 도무지 안될 것 같다고 이러다 투약사고 낼 것 같다고 하니 그냥 퇴사를 하게 해줬다. 퇴사절차를 위해 여러 사무실을 돌아다니고 근무복도 반납했다. 신기했던 건 퇴사하는 간호사가 하도 많아서 다들 덤덤해진 건지 가는 사무실마다 퇴사절차를 무표정으로 안내해주고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혼자 퇴사를 마치고 나오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내 첫 직장을 한달 반(정확히는 한달하고 21일)만에 퇴사하다니 너무 슬프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 병동에 동기라도 한명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내가 그렇게 배우는게 느리고 노답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은 정말 많이 운 것 같다. 태움당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다 너무 힘들었다.... 대병 간호사라는 큰 책임을 가진 직업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도 계속 들었다.
그리고 한 3주정도 다시 쉬고 지금은 좀 큰 요양병원에 들어왔다. 여기는 우리 학과 동기들이 7명정도 다니고 있고 다들 거의 한달 좀 넘어서 우리학교 자대병원을 때려친 애들이다^^.... 오고선 좀 안도감이 들긴 했다. 나만 그렇게 빨리 때려친 것도 아니란거, 자대병원 아닌데에서 일해도 된다는 걸 알게 돼서 훨씬 위안이 되었다. 근데 솔직히 지금 직장이 페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고 첫 직장에서 상처받은 경험 때문인지, 탈임상 항상 찾아보고 있다. 조만간 CRC나 CRA쪽으로 빠지고 싶다. 그리고 다들 하는 루트처럼 글로벌 CRO CRA가 되는 걸 우선 목표로 하고있다. 개인 책상, 점심시간, 화장실 갈 시간이 보장된다는 게 사실 너무 당연한 건데 어찌나 감사하게 느껴지던지.. 3교대 직종에 비하면 더 박봉이긴 하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CRC로 옮길 거다.
나중에 볼 나에게.... 자대병원 때려친거 후회하진 말자! 그때 너무 힘들었고 건강도 안좋았잖아.. 맨날 울고.. 넌 다른 일을 해도 잘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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